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이 時代의 사랑』중
요며칠 나는 최승자의 시집에 빠져있었다. 20대 초반에 읽던 감동과 또 다른 매력에 빠져있었다. 무엇때문에 다시 최승자의 시집을 펼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시집에 인쇄된 그녀의 이름 '최승자'는 다른 어떤 시집의 제목보다 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과 두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 먼저 순서대로 정독한 후, 눈여겨 보았던 작품을 무작위로 골라 읽었다. 몇구절 따라서 옮겨보다가 여기저기 펼쳐지는대로 훑어보기도 했다. 시인의 출생연도, 몇개의 작품, 발행연도를 살펴보니 이 두권의 시집은 그녀가 서른에 접어들 무렵부터 삼십대 초반을 지나면서 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그녀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작품은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이토록 부끄럽고 치욕스러울까. 지금 내 나이로 감당하기에 시인의 시선은 너무도 치열하고, 날 선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첨단에 선 자의 외로움이 물씬 느껴질 정도로 예리한 촉수들. 이 부끄러움과 치욕스러움이 최대한 천천히 지워지길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