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들어 읽은 첫 번째 책이다.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서 지하철에서 읽었다. 그닥 재미가 있는 책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자살 소식을 전해듣고, 그녀의 일생을 떠올리며, 자아를 찾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작가인 주인공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그런데 작품에는 질질 짜는 슬픔이 없다. 작가인 주인공은 자신의 문학론을 펼쳐보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나는 문장마다 여자의 전기에 흔히 쓰이는 보편화된 형식들과 나의 어머니가 살았던 삶의 특수성을 비교했다. 결국 그 둘을 비교했을 때 일치되는 것과 상치되는 것으로부터 실질적으로 글 쓰는 작업이 따라나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단순히 인용문들을 베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용된 듯 보이는 문장들일지라도 그 문장들이 적어도 내게는 특별한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보기에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동기를 지닌 문장들이 아주 확고하고도 신중하게 중심에 있을 때에만 그 문장들은 쓸모있게 여겨진다.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즉 여느 때에는 문장을 쓸 때마다 묘사되는 인물들의 내적 생활에 개입하곤 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끝에 가서 해방되고 유쾌한 축제 분위기를 띄우며 그 인물들이 마치 포낭에 싸인 곤충들처럼 외부에서 관찰하지 않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어떤 문장으로도 완벽히 묘사할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해 진지하게 쓰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끊임없이 새로 쓰기 시작해야 했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뚜렷한 조감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작가가 어머니를 추모하는 방식은 슬픔이 아니다. 슬픔은 부재하는 자를 기리는 감정이기 보다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자기 위안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세계와 결별하는 여러 의식들 역시, 죽은 자의 빈 자리와 살아 남은 자들의 자리를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살아 남은 사람들의 혼란을 방지하는 목적이 크다.
이 작품에는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슬픔의 자리에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해가 놓여있다. 그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죽을 때까지, 작가인 주인공이 어머니의 삶을 재구성하며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인간이 일생을 거쳐 자아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 땅을 거쳐간 한 인간에 대한 최선의 예의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최대한 정확하게, 근사치에 가깝게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최근에 이와 비슷한 일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곧 나의 아내가 될 한 여자의 일이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참는 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살아서 함께 했던 모든 일들을 하나둘 분리해야 하는 고통,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오는 기억들을 통제하는 일, 채워진 슬픔을 모두 소비해야 따뜻한 봄날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