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나는 기형도가 살아낸 것보다 두 해를 더 살고 있다. 단순한 논리로 생각해 본다면 나는 어느새 그보다 훌쩍 커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형도'라는 이름에서 전해오는 차갑고 낯선 설레임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순수한 설레임이라기 보다 맨 처음 그의 시집으로부터 나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느끼게 되는 두려움의 일종일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여기에 몇자 적는다.
그러니까 내가 기형도 시인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99년 어느날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학보사에서 서평기사를 담당하고 있던 학생 기자로, 시를 쓰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문학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서평기사를 쓰던 중에 기형도의 10주기 추모 전집을 접하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을 뼛속에서부터 바꾸어 놓은 책, 한 권 쯤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형도 전집>은 나에게 그러한 책 중 한 권이다.이 책은 예술로서의 시쓰기에 대해 모종의 생각을 가지게 했으며 그 이후 문학적 객기와 치기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쏟게 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지금까지 유효하지는 않다.) 어쨌든 나는 첫 페이지의 '안개'라는 작품에 매혹되어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읽어내고 있었다. 그 당시까지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도 나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그의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당시 내가 주로 읽고 있던 시집은 이성복, 황지우, 김정란 시인의 시집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도 내가 생각하는 주관적인 공통점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형도 전집>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산문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문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것 역시 이전에 이미 <기형도 산문집>으로 출간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읽어보지 못했었다.)그 뒤 나는 그의 어투를 흉내내고 그의 비유들을 하나하나 노트에 옮겨 적기까지 했다.
또 하나 시집 전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죽음으로 기울고 있었던 그의 삶도 그에 대해 내가 가질 수 있는 애정에 한 몫하게 했다. 책장을 열면 대개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두꺼운 책의 저자들의 약력에 흥미를 가지게 된것도 어쩌면 이 책을 통해서 인지 모르겠다. 그의 작품세계를 '죽음이 살다간 자리'라고 말한 어느 평론가(정효구)의 말처럼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이미 차갑게 식어 '빈 집'으로 남아 있으며 공중의 달은 종잇장처럼 그로테스크(김현)하기 까지 하다. 물론 바로 몇 해 전의 이성복, 황지우와의 영향관계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미처 어른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유년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화자의 시선들은 그의 죽음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전집은 내가 이전까지 일구어 놓았던 생각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당시 나는 새로운 터전을 얻기 위해 불을 지르는 화전민처럼 그동안 내가 써 오던 일기장과 습작 노트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것은 마치 어떤 의식과도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객기나 치기로 비춰질 수 있는 그런 행동들이 그리울 뿐이다. 순수함은 때로 맹목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에 맹목적으로 몰두할 수 있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가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나를 잡아주곤 한다.
혹자는 기형도의 시에 대해 "대학생때 한번쯤 좋아할 수 있는 시인"이라고 말하며 빈정대기도 한다. 나도 일정정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맨 처음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느꼈던 충격까지 일시적인 기호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올해는 기형도 추모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출판업계에서 이러한 호기를 놓칠리 없을 것이다. 특히 시집으로서 놀랄만한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기형도라는 컨텐츠를 그냥 둘리 없을 것이다. 이미 20주기 추모 문집으로 지인들이 그에 대한 추억을 묶어 <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판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기형도'를 오랫동안 꾸준하게 사랑받는 '브랜드' 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 씁쓸할 뿐이다.
여기에 그의 시편들 중 하나를 옮겨본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1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시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