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진, 『프리지아꽃을 들고』, 문학과지성사, 1987


시집을 읽는 재미가 예전 같지 않다. 무엇인가에 매혹되거나 사로잡혔을 때의 황홀이 없다. '쓴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만 남아, 그것을 지키기 위한 미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집을 읽는 일이 말 그대로 '일'이 되어 버렸다. 사실 대상의 실체를 확인하고도 그 대상에 홀딱 빠져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콩깍지는 사실보다 허상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마음을 주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에 매혹되고 사로잡힐 수 있다면 그 대상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매혹은 대상에 다가가는 지난한 과정을 견디게 하는 역할을 해주었을 뿐이다. 또 현실에서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도록 삶의 밀도를 조금 높여 주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해서 늘 들떠있는 상태로 살았고, 한눈팔았던 것뿐이고 결국 객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얼마 지속되지 않는다. 막상 그 대상에게 다가섰을 때, 그리하여 더 깊숙이 다가서기도 또 한 발 물러서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을 때, 그 때는 어김없이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고 난 후이기에 황홀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오기로 더 밀고 나가면 함께 파멸하게 되고, 한 발 빼 뒤로 물러나면 스스로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이래 죽고 저래 죽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후회하고 죽은 듯이 살아가는 일만 받아들인다. 눈 먼자의 삶이다. 사실 자신을 사로잡았던 대상의 실체를 마주한 이후의 삶은 견디는 삶이다. 혼자서 견디는 삶이다. 그러나 우상은 무너지고 그것을 마주한 참담함을 혼자서 견딜 수 있을 때 역설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은 조금 더 지속된다. 아니 그러기를 바랄뿐이다. 그토록 열렬한 마음가짐으로 다가섰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그토록 바라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신이다. 삶은 늘 이런 식이다. 그래서 언제나 견뎌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럴때마다 권혁진의 시집 『프리지아꽃을 들고』를 읽었다. 처음 시집을 읽기 시작할 그 무렵에 읽었던 시집이고, 이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기 해준 시집이었다. 묘사에 매혹되게 했으며 문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안내해준 시집이었다. 초판에서 나는 묵은 종이 냄새가 좋았고 뒷장으로 번지는, 지금과는 다른 투박한 활자체가 좋았다. 오늘밤 다시, 처음 매혹되었을 때의 기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쁘게 말하다 2018. 3. 16. 00:28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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