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원리
 

믹서기 속에서 토마토 하나가 분쇄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어떤 사물에 대해 생각하다가 빠르게 회전하는 모터의 원리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은 더 작은 눈이 되었고 발목은 더 얇은 발목이 되었다 코가 나누어져 입이 되는 일은 없었으나 우리는 나누어져 남남이 되었다

마술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마법사의 소매만 쳐다본다 미분과 적분은 아름다운 개념이었다 무한을 상상하는 동안 등 뒤로 손을 뻗는 당신의 기척을 알지 않아도 되었다 아무리 코를 풀어도 얼굴은 뭉개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소매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마술사는 입 속에서 끊임없이 만국기를 꺼냈다 벽장에 숨어 있던 군중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이 만국기에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마술사의 두 손에서 드디어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낮잠을 자는 동안 아내가 읽어주는 소설은 대개 이런 것이다 회전하며 전진하는 레미콘의 변증법으로, 한 낮의 벽장 속에서 뛰쳐나가길 기다리는 군중들이 머리 속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시작』 2018년 봄 (통권 63호)

집시의 詩集 2020. 1. 5. 23:25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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