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어느 옥탑방에서

정오의 분홍색 물체

건물 그림자들이 북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내 차는 서쪽으로 달렸다 아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은 집이 더 어두웠고 집안은 검은색이 한 뼘 더 자라 있었다 십자 드라이버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 조였다 분홍의 얼룩이 소파에 뒹굴다 그대로 소파가 되었다 얼룩은 생활의 옆에서 번식했다 한발 비껴서도 언제나 한 복판, 차는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미니어처 마을을 내려다보며 창세기를 생각했다 숨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분홍색 반점으로 피어나는 정오 전염병처럼 얼굴이 따끔거렸다 오늘은 꼭 기도하고 잠들어야겠다

『시현실』 2018년 봄호(71호)

집시의 詩集 2020. 1. 13. 02:09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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