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장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아침이었다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았지만 필통 안에는 생일 초대장이 가득했다 뭉툭한 연필을 찾아서 달력에 동그라미를 신경질적으로 그렸다 아무도 나의 생일을 찾을 수 없었다

풍선을 불었고 클립을 풀었다가 다시 구부리며 놀았다 뒷집 누나들이 뒷물을 한다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함께 욕을 배우던 아이와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고 도망 다녔다 깡통을 주워 멀리 걷어차며 놀았다 담벼락 밑에서 오줌을 갈기고 귀가하는 저녁, 아랫목은 언제나 누렇게 달아올랐다

잠자리에는 파랗게, 이끼들이 돋아났다 소독차가 지나가면 엄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끔 빗자루로 두들겨 맞는 친구들의 악에 받친 욕이 들리기도 했다 아빠 우리는 왜 칼라 테레비가 아니에요? 그러나 칼라나 흑백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핏기 없는 얼굴이었다 담장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그네가 녹슬어 툭, 끊어진 날도 있었는데 아무도 먼저 나서서 고쳐주지 않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수도를 시멘트로 덮던 날, 아저씨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돌아갔다 밤새 삐걱거리는 쇳소리만 마당에서 함께 흔들렸다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시와시학』, 2019, 여름호

집시의 詩集 2020. 1. 15. 01:17  트랙백 (0) : 댓글 (0)

댓글을 달아 주세요

Copyright ⓒ 내가 쓰는 한 권의 두꺼운 책, All Rights Reserved. Since 200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