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을 때,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잠시 망설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강의계획서를 쓰면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준비했다 그들을 앞에 두고 글 쓰는 이의 심장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심장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혈관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가끔 지구 반대편, 철새들의 파타고니아를 상상하라고 말한다 그것뿐이다 내 시의 효용성을 생각한다면 나는 함부로 오늘 저녁에 대해서 쓰지 못한다 오늘 저녁은 언제나 본질로부터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너의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맥박이 느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대해서, 그것이 해가 솟기 바로 직전의 여명쯤은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차근차근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것, 또는 김혜수를 완성하는 것, 이것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창밖에서 비명이 들리더라도 눈을 찔끔 감아버리자 성호를 긋고, 아멘. 우리는 모두 지킬 수 있는 약속보다, 새끼손가락을 사랑한다 끝내 지켜지지 않을 때까지만 약속이 되는 것처럼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나는 너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포지션』, 2016, 겨울호

집시의 詩集 2020. 1. 17. 09:00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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